120년에 걸친 한국 선교, 인요한 박사 “나는 북쪽의 의료 A/S맨이 되는게 꿈입니다”-1부-

May 28, 2022 3:36 pm Published by Leave your thoughts

♥ 한국 선교사로 4대, 120년에 걸친 린튼(Linton) 가문

♥ 린튼 가문의 막내 아들, 신촌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장 인요한 박사

♥ 6.15와 통일, 북녘동포, 그리고 재외동포에 관한 이야기.

세브란스 국제 진료센터에서 인요한 박사를 만나기로 한 그날 오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봄 가뭄 끝의 단비라고 했기에 눅눅함 쯤은 참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오가는 세브란스 국제의료센터.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K-의료의 위상이 느껴지는 듯해 가슴이 뿌듯했다.

그때 진료센터 안 쪽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아야, 손님 들어오시라 그래라잉.”
어릴 적 무안의 외가에 가서 지낼 때마다 익히 듣던 남도의 진한 억양이었다.

직원의 안내로 들어간 사무실에선 크고 후덕한 체구에 선한 인상의 파란눈의 ‘순천 미국 아저씨’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기자를 맞이 해주었다.

“나는 뼛속부터 한국, 순천 촌놈입니다.” 그의 첫마디는 기자의 긴장을 풀게 했고. 이야기는 술술 풀려 나갔다. 사실은 크게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인 박사 스스로가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날 인 박와의 대화는 기승전 북한 의료 지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 재외동포들의 참여와 도움이 절실하다고 했다.

“지난 97년부터 북한을 29차례 다녀왔습니다. 물론 의료 지원 때문이었죠. 요즘은 코비드 때문에 못갔는데 걱정이 됩니다. 워낙 그곳 의료시설이 낙후돼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방의 경우에는 말도 못합니다.”

그래도 그는 북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한다.

”정치적 경제적 희망은 내 소관이 아니고 의료 문제에서의 희망 입니다. 한 예를 들면 나진 선봉의 의학 수준이 평양보다 높아요. 첨단 복강경 수술을 척척 해내는 등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제대로 된 장비가 갖춰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20년 이상 미국, 카나다, 호주의 동포 의사들이 때론 감시와 제재를 피하는 탈법을 하면서 그곳에 자신들 손으로 직접 장비를 들고 들어가 그곳 병원들을 전부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동포들의 덕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요. ”

듣고보니 그가 의료장비 지원에 그토록 매달릴만하다.

“그래서 그때 내가 느끼고 결론 내린게 이거였죠.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장비만 갖다주면 알아서 잘 할 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의사들의 자질, 의기사들의 기술 수준은 뛰어납니다. 조선 사람어디 갑니까? 기구가 없어서 못할 뿐이지, 장비만 제대로 제공하니 알아서 다 하더라구요.”

의료봉사, 지원이 힘든 게 요새 의료기기들이 워낙 복잡하고 사용 방법이 어려워서 머리와 지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다. 하지만 북쪽 의료진들과 기술자들의 수준은 상상이상이는 얘기다.

그의 경험담이 이어진다.

“빌리 그래함 재단이 신천에 가서 병원에 장비를 새 장비도 아닌데 중고로 다 꾸려주고 나왔죠. 그러면서 걱정을 했데요. 아프리카 같은 경우 의료장비 고쳐서 다 돌아가게 해주고 1년 뒤에 가보면 90 프로가 멈춰있었답니다. 그 사람들은 다 고장내 버리고는 나 몰라라 합니다. 그랬는데 1년 뒤에 북에 다시 가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1년 뒤에 가보니 90프로 이상이 잘 돌아가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고치면서 나름 업그레이드도 시켜가며 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희망을 보았죠.”

그만큼 북의 기사나 의사들이 머리가 있어 개조나 응용을 잘한단다 그리고 의료 기계를 정말로 중히 여기고 아낀단다. 그래서 일하기 매우 신나는 곳, 도와주는 보람이 있는 곳 이란다.

알려진 대로 그의 북한 사랑 정확히 말해 북한 동포 사랑은 집안 내력이다.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 서방에서 최초로 구호의 손길을 펼쳤던 곳이 그의 둘째 형 스티브 린턴 씨가 운영하는 유진벨 재단이다. 이후 유진벨 재단은 북한 구호의 상징처럼 운위되고 있다.

린턴, 인요한의 미국 이름. 그도 유진벨 재단 이사의 한 사람. 의사인 그가 천착했던 부분이 의료 지원인 것은 당연한 귀결.

“북한의 의료 시설은 정말 열악합니다. 평양이나 신의주 등 몇몇 큰 도시를 빼면 정말 앞이 캄캄하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우리는 남들이 못가는 오지 다 가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우리한텐 크게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했겠죠.”

그를 지칭하는 말은 참 많다. ‘한국 의사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서양인.’ ‘한국형 앰뷸란스 최초 개발자’ ‘5.18 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시민군 통역’, ‘북한 결핵 퇴치 사업 및 의료기기 지원 활동가’ 등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의 포커스 남북 교류와 화해 특히 의료 지원이다.

1959년 전주의 한 병원에서 출생했고 유년시절을 비롯하여 그의 삶의 대부분을 머금고 있는 곳은 전라남도 순천이다. 우주의 중심은 순천이라고 늘 이야기 할 만큼 그의 순천 사랑,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순천에서 누군가 왔다고 하면 그가 지인이든 아니든 성심껏 대한다. 기자와 인터뷰 도중에도 순천에서 온 환자가 잠시 인사를 하러 들르기도 했었으니.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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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ost was written by 크리스 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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