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에 걸친 한국 선교, 인요한 박사 “나는 북쪽의 의료 A/S맨 되는게 꿈입니다”-2부-

May 28, 2022 3:32 pm Published by Leave your thoughts

♥ 유진벨 재단의 북한 결핵 퇴치사업과 연계해 1997년부터 29회 방북

♥ 무슨 일이 있어도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멈춰져서는 안돼

♥ 미국도 북에 대해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에 기초를 둔 행보를 보여야

마침 때가 6.15 선언 21주년에 즈음해 있다. 인 박사가 생각하는 6.15 선언의 의미와 그가 가진 북쪽 동포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연민, 더 나아가 그가 꿈꾸는 통일 한국은 어떤 것일까?

10여년 전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북한 의료 및 통일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매우 깊었고 이에 대해 인 박사에게 질문 했단다. 이박사는 대뜸 한국에 일하러 온 중국 동포들에게 건강보험과 노동허가를 조건 없이 주라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그 호칭 또한 공식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했단다.

“당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일본이나 미국의 한국 동포들한테는 재일동포, 재미동포라고 하면서 왜 이들에게만 ‘조선족’이라고 하며 호칭에서부터 차별을 두느냐. 그리고 한국에 일하러 오는 젊은 중국 동포들은 소위 말하는 3D 업종에 많이들 종사하는데 이들 대부분 매우 건강해서 대한민국 건보재정이 큰 짐이 안 된다. 그리고 북쪽에는 중국 동포들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남한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곳으로 말이 다 들어간다. 북쪽 사람들은 남한에 대해 자본주의가 타락 됐다는 등 끔찍한 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으며 교육을 받아오는데 남쪽 사장들이 이주노동자들 책임 안 지고 버리는 극소수적인 일들이 북쪽 동포들에게는 남쪽이 다 그런 것 처럼 일반화 되서 이야기가 넘어간다. 좀 따뜻한 대한민국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건강보험과 노동허가를 주고 그 중국동포들로 하여금 ‘남조선은 중국 동포들도 이렇게 챙긴다더라’ 이런 말이 전해지게끔 하여 우리의 선한 기운으로 북쪽의 민초들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고 노 대통령께 답을 드렸었죠.”

의표를 찌르는 탁견 아닌가.

한국 내 중국 동포들은 남한이 중국보다 더 잘 산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과 동시에 이곳 생활의 아픔 또한 깊단다. 그래서 인 박사는 분명히 될 통일이지만 아름다운 통일이 되기 위해선 재한 중국 동포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리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가 통일에 관심을 갖고 남북문제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알려진 대로 광주 민주항쟁 때의 경험과 그래서 만나게 된 김대중 대통령 때문이다.

그는 5.18 당시 22세. 연대의대 2학년 때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시민군과 외국 언론의 통역으로 참여했고 이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그는 광주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이들의 고통과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1994년 유진벨 재단의 스티브 형님을 통해 동교동에서 김대중 ‘선상님’을 독대 할 기회가 가겼다.

만나자마자 큰 절을 한 후 “선생님, 그 전두환이 모가지를 따버려도 시원찮을 놈을 왜 가만두십니까”

“ 그 양반이 너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원장. 보복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선 안되네. 그러시면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 넬슨 만델라에 대한 즉흥 일장연설을 하시는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디제이 당신의 마지막 꿈이 화해와 용서를 통한 남북의 평화통일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전해 주셨죠.”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취임식 귀빈석에 초대받아 앉았는데 아랫 쪽에 대머리가 보이고 그 옆엔 노태우가 보였단라. 아니 이 거룩한 장소에 어찌 저런 살인마가 온단 말인가. 그러나 당신을 죽이려고 하면서 까지 괴롭힌 그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는 디제이를 보면서 사랑과 용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 위대함을 보았다고.

인 박사에게 재외동포와의 인연 및 교류에 대해 물었다.

“3년 전 문정인 교수와 미국 L.A., 워싱턴, 뉴욕 한인회를 돌며 ‘우리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왜 해야하는가’를 주제로 강연을 했었어요. 동포 사회의 보혁갈등을 실감하는 자리이기도 했고 강성 우익이 정말 많더라고요. 하지만 북쪽이 겪고 있는 결핵 문제의 심각성 및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 영상물을 보여주며 자세히 실상을 설명해주니 팔짱 끼고 보던 그들 마음이 많이 녹습디다. 북쪽에 관해 미주 동포 사회든 한국 사회든 특히 우익의 가장 큰 문제는 북한 체체와 지도급들과 더불어 그 민초들 까지 도매금으로 몰아 미워한다는 거에요. 민초들이 무슨 죕니까. 민초들 까지 미워해선 안됩니다. ”

그 인식을 전환하려면 일반 언론이나 선전용으로 그들이 전해주는 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곳에 직접 방북해 활동하는 NGO들이나 의료 봉사자들, 유진밸 재단, 어깨동무 같은 홍보물들도 접하면서 북쪽 민초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 사회에 대해 박식해져야 한다는 것이 인 박사의 의견이다.

“생각해 보세요, 언젠가 통일이 되어 그들이 남쪽에 왔어요. 그런데 남한 사람들 사는걸 보면서 그들이 혹여 가지게 될지도 모를 자괴감이나 위화감, 서운함도 생각해 봐야해요. ‘우리는 북에서 너무나 어려웠는데 너흰 어쩌면 우리를 그렇게 도와주지도 않았느냐—라고 원망하면 무슨 말을 할겁니까.

그리고 우리도 통일 후 북쪽을 올라가 보니 그 척박한 환경을 보면서 왜 진작 못 도와줬을까 후회하지 않겠어요? 북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춰져선 안됩니다.”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인 박사 자신의 일생의 미션이라고 했다. 한국의 보수 우익 정권에 왜 우리가 통일 한국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마음에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에 들어갔었단다. 박 전 대통령 당선 후 1년 동안은 북쪽에 대한 올바른 지원 방법과 그곳에 병원 및 의료장비 현황 등 실무적인 것들 파악하느라 일생 중 가장 바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 대통령 취임 1년 정도 지나니 대북 관련 현안들에 대해 당시 새누리당이 흥미를 잃어버리더라고요. 게다가 정치적으로 대립이 오니 북에 나가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 물자 승인도 안 해주고 심지어 유진 벨 재단 결핵 의약품들 마저도 승인을 안해줍디다. 그것 때문에 사실은 박통 당시 통일부와 매일 엄청 싸웠어요. 지금도 변함 없는 그 당시 나의 미션은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 그것 뿐이었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라 북한의 지도자들과도 좀 더 부드럽게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들어갔었는데 인도적 지원 마저 길이 막히니 그땐 정말 좌절스러웠어요.”

은퇴 후에도 북한의 의료사업 돕기 계획

그에게는 꿈이 있다 엠뷸런스를 몇 개나 뜯어가며 한국형을 개발해 냈을 정도로 기계를 워낙 좋아하는 그는 새 장비 주고 병원 지어주는 거창한 일 보다도 북쪽에 고장난 의료기기들을 AS 해주는 그 일을 하는게 꿈이다. 기회가 열린다면 죽는 날까지 그 일을 하고 싶단다.

예전에 곽산에 갔을 때 거기 결핵병원 수술실에 전구가 다 나가버렸다. 독일제 시멘스 전구. 아주 아주 오래된 것 이었다.

“세브란스 기사들이 여그서 찾아보는데 그 전구가 없어요, 그래서 수 작업으로 아예 유리를 불어서 거기에 맞는 전구로 만들어서 가져가 끼워주니 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수작업해간 전구에 불이 들어왔을 때의 희열감. 보통 희열이 아니었지요. 이처럼 북쪽이 외국과의 연결이 어려우니 새 장비도 중요하겠지만 헌 장비를 고쳐서 이들이 사용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꿈꿔요. 기계를 바꾸지 않고 고쳐서 돈도 많이 안들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그들의 조국에 있는 병원들을 돌면서 헌 장비들, 고장 난 부품 리스트를 좍 만들어서 그거 구해 갖고 가서 전달해주고 그곳의 기사들이랑 의사들이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북쪽의 AS맨이 되는게 내 꿈이에요.”

그 일이야 말로 그런 장비들 쉽게 접할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재외동포들이 가장 크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호소다.

파란 눈의 투실한 순천 남자, 가난했지만 풋풋했던, 그러면서 내것 네것이 없었던 따뜻한 인심으로 풍요했던 그 기억 때문에 그곳을 아직도 우주의 중심이라 말 하는 그 남자,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일을 천심으로 대신 해 주고 있는 그 남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신촌길은 비가 멎어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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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ost was written by 크리스 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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